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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교에서 “강화경찰서에 검속된 유희철·조대신 등의 석방을 요구하자”고 제의하여 5시경 약 5~6,000명이 경찰서에 도착하였다. 이어 계속된 구금자 석방 요구와 항의는 일경과 다툼으 로 이어졌다. 유봉진이 석방 교섭을 한 결과 약 2시간 후에 석방되었다. 그러자 군중들은 서 장에게 만세를 부르라 요구하여 서장도 독립만세를 불렀다. 삼산에서는 이안득(李安得)이 4월 7일 오후 8시경 석모리 당산 꼭대기에 올라 주민 십수 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6) 연천군 백학에서는 3월 21일 조우식(趙愚植)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그가 두일리 장날 오 후 6시경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이낙주(李洛周) 등이 호응하여 만세를 합창하므로 군중들 이 모였다. 그는 면장 윤규영(尹圭榮)의 만세 고창을 제안하였다. 이에 정현수(鄭賢秀)가 면 장을 찾아왔고, 이낙주(李洛周)도 면장 손을 잡고 “우리들과 행동을 같이 하라!”고 강요하고, 조우식·홍순겸(洪淳謙) 등도 “같이 만세를 부르라!”며 구타하므로 면장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정현수가 시장 부근 집 대문을 돌로 두들겨 참가를 권유하고, 박영학(朴永鶴) 등이 참가하지 않으면 “살해 또는 방화한다”고 소리치고, 이어 구금룡(具今龍)이 소방용 경종(警 鐘)을 쳐서 150~160명이 모였다. 이들이 면사무소로 가서 면서기 정기만(鄭基萬)에게 만세 를 부르라고 요구하였으나 그는 불응하였다. 이에 조우식·정현수 등이 투석하여 유리창 1 장, 방문 1개 등을 파손하였다. 헌병들의 제지에도 약 200명 군중들은 계속 만세를 연호하였 다. 10시경에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미산 마전리로 향하여 이튿날 오전 3~4 시경 마전리 문묘(향교)에서 새벽 닭이 울 때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백천 기(白天基)도 밤에 통구리 주민 약 60명을 모아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어 마전리 헌병주재소 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중면에서는 3월 31일 나용기(羅龍基)가 이홍식(李洪植)을 불러 “명 4월 1일 오전 7시경 세 야골에 집합하라”는 격문 6통을 만들어 한씨동(韓氏童)이 횡산·중사리, 나성돈(羅聖敦)이 삼관리, 나개동(羅開童)이 합수리 등 2개리 구장에게 배부하였다. 오전 7시경 삼관리에 모인 면민 약 400명은 나용기가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읍내를 향하여 만세 행진을 하던 중 헌병의 제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