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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씩 인쇄하고 대개 낮에 종로통·동대문 등지에 배포하였다. 이외에 김윤식(金允植)이 청원서를 작성하여 일제측·일본 신문사·국내 신문사 및 일 부 인사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는 3월 20일 “이번 소요는 도저히 설유로써 돌이킬 수는 없으 며 위력으로써도 복종시킬 바가 아니므로 천심에 따라 일본은 모름지기 조선 독립을 인정하 지 않으면 안된다”는 청원서를 만들었다. 이어 3월 22일 이용직(李容稙)에게 보이고, 3월 25 일 김기수(金麒壽)가 2통을 정서하여 김윤식·이용직 날인을 받고, 김유문(金裕問)·김기수 는 등본을 만들었다. 밤에 김윤식은 이계태(李啓泰)에게 내각총리대신앞 봉서 1통과 조일(朝 日)·시사(時事)·보지(報知)·대판매일(每日)신문사 등본 4통을 교부하여 일본에서 우송할 것과 동경에서 사본을 다른 신문사에도 송부를 부탁하며 여비 200원을 주었다. 이건태는 3 월 26일 부산에서 경부 이홍순(李弘淳)을 만나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3월 27일 5통을 일본으 로 발송하였다. 김유문은 3월 25·26일 24통을 복사하여 3월 25~28일에 모씨 1매, 김유정 (金裕定) 2매, 이흥규(李興珪) 1매, 김진하(金鎭夏) 2매, 김진한(金鎭漢) 2매, 기타 6~7명에 게 1매씩을 교부하였다. 김기수도 복사본을 서정순(徐貞淳)·이철상(李哲相)에게 1매씩을 교 부하고, 3월 27일 경성일보사·매일신보사에 위탁서와 함께 우송하였다. 이용직은 김기수 의 복사본 2통을 받아 3월 25일 이충규(李忠珪)에게 사본 약 30통을 작성케 하고, 3월 29일 대판(大阪) 모신문 기자에게 교부하였다. ② 유인물 배포 : 『조선독립신문』은 임준식·김상규를 통해 학생 등이 파고다공원 등에 배포하였다. 장채극·전옥결·이철은 약 200매를 이인식 등 십수 명에게 전달하여 송현· 간·안국·인사동에 배포하였다. 이들은 3월 2일 『독립신문』 제2호·「독립가」 수백 매를 보 성고등보통학교 학생을 통해 배포하였다. 3월 5일 전옥결이 한위건에게 제3호 약 80매를 받 아 강창준 등이 배부하였다. 이어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독립신문』 제17~23호까지 매 일·격일·4~5일에 약 200매를 인쇄하고 김춘남(金春南)이 배포하였다. 이어 조민언(趙敏 彦) 원고로 장채극·김홍식 등이 4월 10~17·8일까지 제24~27호 수백 매씩을 인쇄하고 학 생들이 배포하였다. 또 임승옥은 『조선독립신문』 제2호는 서적조합 사무실, 제5·6호는 유 병륜 집에서 인쇄를 도왔다. 김동혁은 3월 2·5일 허신(許信)에게 『조선독립신문』 제2호 10 매·제3호 7~8매를 받아 낙원동에 배포하였다. 한경익(韓景翊)은 3월 1~6일까지 이지익(李 枝翼)에게 「조선독립신문」 제1호 약 300매·제2호 약 100매, 「국민회보」 약 100매, 3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