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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총 설 안된다”는 100매·4월 25일 특별호 “내부무 장관이 조선에 있는 서양인 7명을 초청하여 시 국에 관한 의견을 질문하였는데, 그 서양인들이 조선인에게 동정하는 답변을 하였다”는 약 70매를 인쇄하였다. 「경고」와 「자유민보」는 최석인(崔碩寅)·백광필(白光弼)·유연화(柳淵和)가 3월 하순부터 4 월 중순까지 인쇄 배포하였다. 이들은 3월 5일 남대문 독립운동에 참가하고, 최석인·백광 필은 3월 하순경 ‘조선국민자유단(朝鮮國民自由團)’의 ‘근래 조선인 유지자 사이에서 “조선인 에게 출판·언론의 자유를 주고 조선에 대하여 식민지의 이름을 삭제하고 대의사를 제국의 회에서 선출하게 하며 헌병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여…우리는 최후의 1인에 이르기까지 분투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협의하였다. 최석인이 「경고」를 집필하여 최석인·백광 필은 약 300매를 인쇄하였다. 다시 「자유민보(自由民保)」를 협의하고 유연화가 논설, 최석인 이 기타 기사를 담당하여 4월 1일부터 중순까지 “소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등의 「자유민보」 제1~제5호까지 각호 약 1,000매씩을 인쇄하여 직접 또는 의 뢰하여 광화·동대문 부근에 투입하였다. 전경석(全景錫)도 「자유민보」 제5호 인쇄를 도왔다. 「조선민국임시정부포고문(朝鮮民國臨時政府布告文)」·「도령부령 제1호」·「도령부령 제2호」 는 4월 7일에 박이근(朴理根)·권희목·허익환·박형건(朴泂鍵)이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박 이근은 2월 20일경 독립운동을 들었으나 독자적인 실행을 추진하였다. 대련의 이정(李晸)과 허익환을 통한 천도교와의 교섭도 여의치 않았다. 4월 7일 밤 허익환이 “조선국민대회·자 유당 연합회의 결과 손병희를 조선 정도령으로 선출하고 조선민국임시정부 창립 장정을 의 정하였음을 선언한다”는 「조선민국임시정부포고문」·“조선민국임시정부 창립 장정에 의하 여 각부 경(卿) 및 부관을 임명하였음을 포고한다”는 「도령부령 제1호」·“파리만국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할 의원을 지정할 것을 포고한다”는 「도령부령 제2호」 원고, 백지 1,600매, 등사 판을 박이근 집으로 가져왔다. 밤에 합철하여 400통을 인쇄·배포하였다. 「국민신보(國民新報)」·「국치기념(國恥記念)」은 이일선(李日宣)이 4월 중순부터 8월 하순경 까지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그는 독립사상 전파에 인쇄물 출판·반포가 상책으로 생각하고 집과 근무처에서 「국민신보(國民新報)」 제1~26호·「국치기념(國恥記念)」 특별호로 “조선은 중국과 함께 동양 문명의 연원이다…지금 인류는 자유 평등이어서 강약의 구별없이 다 같이 낙을 누릴 때가 왔다. 조국을 광복하고 국치를 말끔히 씻어라”라는 내용으로 1회 약 300여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