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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총 설 대회취지서를 인수하고, 김사국과 함께 이경문(李景文) 방에서 인쇄물 약 4,000매, 간판 1개 를 꺼내 숙소 신용식 집에 가지고 갔다. 그는 임시정부선포문, 임시정부령 제1호·제2호 등 3매철을 전옥결·이철·강우열(康禹烈) 등 4명에게 배부하게 하였다. 장채극은 백포(白布) 를 사서 자동차 탑승자·지휘자용 9기를 만들고, 전옥결은 ‘국민대회’·‘공화만세’기와 ‘국민 대회’ 간판을 제작하였다. 4월 23일 장채극·김유인은 숙소에서 유태응·박수봉 등에게 5원 씩과 공화만세·조선독립 1기씩을 교부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탑승자 이만봉 35원· 기타 2명 30원씩과 인쇄물철 약 10매씩·깃발 2기씩을 교부하였다. 강우열은 동대문·김병 호(金炳鎬)는 서대문·유기원(柳基元)은 창덕궁·김홍식(鴻弘植)은 시내에서 배포할 인쇄물 350부씩을 교부하였다. 정오에 유태응·박수봉 등 3명은 보신각에서 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를 부르고, 이만봉 등 3명은 서대문·동대문·남대문에서 기를 흔들며 인쇄물을 배포하고, 김병호 등도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장채극·전옥결은 인력거를 타고 봉춘관에 간판을 들고 가서 전백철·주병봉에게 게시하게 하였다. 이관우(李寬宇)는 4월 23일 국민대회 개최를 듣 고 4월 22일 밤 윤화병(尹華炳)·윤정식(尹正植) 등에게 참가를 권유하였다. 4월 23일 정오 경 종로에서도 ‘국민대회’기를 들고 학생들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5월 31일에는 윤여옥(尹餘玉)·차대유(車大輶 ) 등이 연해주 ‘대한국노인단(大韓國老 人團)’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5월 31일 경성에 도착하여 오전 11시경 보신각 앞에서 각자 태극 기를 휘두르면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6) 유인물 배포 ① 유인물 : 조선독립신문은 이종인이 2월 28일 독립선언 전말, 독립사상 고취, 독립만세 운동 권유 등을 내용으로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작성하였다. 그는 박인호와 협의하여 3월 1일 오전 10시경 윤익선(尹益善)의 동의로 김홍규가 보성사에서 약 10,000매를 인쇄하였다. 「각성호회보(覺醒號回報)」는 양재순(梁在順)·김호준(金鎬俊)이 3월 8~11일까지 4일간 김 호준 집에서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분기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라’는 내용으로 제1~4호 까지 매일 밤 각호 약 80매씩을 만들어 양재순이 광희정에 배포하였다. 제1호에 “2천만 동포 여! 이제야 깊은 밤의 꿈 속에서 깨어났다…활발 용감한 우리 3천리 강산 2천만 동포여! 태 극기를 손에 들고 활동하라!”, 제2호에 제1호와 같은 취지, 제3호에 “천하에 두려워 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