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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하였다. 이들은 4월 2일 인천부 각국(만국)공원에서 가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안상덕은 천 도교, 박용희(朴容熙)·장붕(張鵬)·이규갑은 예수교, 김규(金奎)는 유생, 이종욱(李鍾郁)은 불교 대표자로 하며, 한남수·홍면희는 대회 주선을 맡았다. 수일 후 김규·한남수·김사국 등이 국민대회개최취지서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4월 3일 안상덕 소개로 상해의 홍진의(洪鎭 儀)가 참여하고, 이후 이규갑·김규가 윤이병(尹履炳)·이용규(李容珪), 이헌교가 이성수(李 成修)·최전구(崔銓九)에게 권유하고, 김사국은 전협(全協)·이동욱(李東旭)·현석칠(玄錫 七) 등과 접촉하였다. 한남수는 상해와 연락을 위해 4월 8일 출발하며 후사를 이규갑 등에게 일임하였다. 이동욱(李東郁)은 조선13도대표자 명의로 ‘각 지방 대표자를 규합하여 본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더욱 더 독립운동에 노력할 것’이라는 「국민대회취지서」와 파리강 화회의 출석 위원을 선정하고 약법(約法)을 제정하는 「선포문」을 만들고, 현석칠이 목판으로 약 6,000매를 인쇄하였다. 김유인·김사국 등은 서린동 봉춘관에서 조선13도대표자 집회, 학생시위운동, 노동자 3,000명의 독립만세 고창, 자동차로 시내 인쇄물 배포 등을 결정하였 다. 4월 19일에는 안성덕·현석칠이 천도교·예수교 대표로 각각 600원을 제공하고 민강(民 橿 )이 출납을 맡았다. 이튿날 안상덕의 500원은 민강을 통해 밤에 김유인에게 교부되었다. 이춘균(李春均)은 4월 17~18일경 “조선은 독립국이므로 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적국 인 일본에게 납세하지 말라. 그 재판 및 경찰과 행정의 명령을 받지 말라!”의 「임시정부선포 문」·「임시정부령」 제1호·제2호 2종 약 100매를 받아 장채극에게 의뢰하고, 장채극·김유 인은 배포에 부족함을 느껴 윤좌진에게 부탁하여 4월 20~22일 김종석·나종하(羅鍾河)· 전옥결과 김태정(金泰鼎) 집에서 2종을 1매로 약 1,500매를 인쇄하였다. 4월 22일 김유인은 장채극에게 4월 23일 국민대회 개최, 자동차 3대로 ‘국민대회·공화만세(共和萬歲)’ 각 2기 씩을 들고 동대문·서대문·남대문을 출발하여 유인물을 배부하며 정오에 종로 보신각 앞에 집합, 노동자 3,000인을 보신각에 배치하여 지휘자 3명에게 ‘국민대회’ 등 기를 게양하고 정 오에 독립만세 고창, 봉춘관에서 조선13도대표자의 조선가정부 선언, 봉춘관 앞에 국민대회 간판 게시 등을 알리고, 활동 비용 200원을 교부하였다. 이에 장채극 등은 활동자 주선을 최 상덕에게 의뢰하였다. 최상덕은 50원을 받아 박수봉(朴壽奉)·이만봉(李萬奉) 등을 자동차 탑승자·지휘자·만세 수창자, 유태응(劉泰應)을 노동자 지휘자, 전철백(全徹伯)·주병봉 (朱炳鳳)을 간판 게시자로 의뢰하였다. 장채극은 밤에 방덕환(方德煥) 방에서 선포문·국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