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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총 설 흔들었다. 일경들이 군중들을 제지하고 강기덕·김원벽 등 다수를 체포하였다. 그러나 일경 을 피한 군중들은 남대문에서 대한문 앞·무교정을 지나 보신각 앞에서 합류하여 독립만세 를 고창하였다. 또 유생들이 청량리 반우식(返虞式)에 상소를 올리려 시도하였다. 유준근(柳 濬根)·송주헌(宋柱憲)·백관형(白觀亨) 등 14명이 3월 2일 수창동 모 여관에서 ‘지금 독립선 언이 일조에 진동하고 이미 패연히 이를 막을 자 없다…따라서 대위(大位)를 복구하여 일국 에 호령하며 각국에 통고하라’는 상서를 작성하였다. 3월 5일 반우식(返虞式)에서 송주헌이 상소를 올리려 하고, 어대선이 독립 연설을 할 때 고종의 연(輦)이 통과하므로 군중과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정호석(鄭浩錫)은 오전 9시 반경 왼손 무명지를 깨물어 태극장(太極章)을 그 려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는 동막 흥영학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박성철(朴性哲)·오정엽(吳貞燁)에게 참가를 요구하였다. 이들은 학생 수십 명과 공덕리까지 만세 행진을 하였다. 김경준(金敬俊)은 이왕직 양악대 악수로 ‘삼청동 및 팔판동 주민들은 왜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조선은 장차 독립하려고 하고 있다. 모름지기 노력 분투하지 않 으면 안된다’고 연설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3월 26~7일에도 김재완(金在 完)과 삼청동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② 3월 하순 : 일제의 무력적 탄압과 검거 작전으로 3월 중순에는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하 지 못하였다. 3월 12일 김백원(金百源)·문일평(文一平)·차상진(車相晋)·문성호(文成鎬)· 조형균(趙衡均)·김극선(金極善)·백관형 등 유생들이 서린동 영흥관에서 회합하고 조선13 도대표자 명의로 ‘조선 독립은 동포 2천만의 요구다. 우리들은 손병희 등의 후계자로서 조선 독립을 요구한다’는 「애원서」를 만들었다. 차상진·문성호가 이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고, 김백겸·문일평·김극선·조형균·백관형은 보신각에서 모여 문일평이 낭독하여 독립 의지 를 표출하였다. 3월 하순에 다시 본격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0일 김상직(金相稷)이 오후 5시경 이백룡(李白龍) 집에서 양지에 태극기를 그리고 ‘대한제국 만세! 이 사직은 이전에는 조선총독부 경영이었으나 금년부터는 대한민국의 소유로 돌아왔다. 대황제폐하 만세! 국민 이 씀’이라 쓰고 밤에 사직단문 앞 기둥 높이에 부착하였다. 3월 22일에는 김공우(金公瑀)가 3월 21일 정지현(鄭志鉉)에게 ‘명 22일 봉래정 공지에서 노동자대회가 개최된다’고 들었다. 그는 이틀간 중림·화천정 노동자를 모아 수백 명과 의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