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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외 2, 3명과 중등 정도 학생 김백평·장채극·전옥결·이규송·장기욱·전동환(全東煥)· 이용재(李龍在) 등 십수 명이 모였다. 강기덕이 3월 1일 오후 2시 조선독립선언을 하고 선언 서를 발표하며 만세운동을 할 것이니 각자는 학생을 결속하여 참가함과 독립선언서를 학교 중심으로 배포하라고 전하였다. 이어 김문진이 각 배포 장소를 지정하여 학생 12~3명에게 독립선언서 100~300매를 교부하였다. 그리고 김원벽·강기덕·한위건은 3월 1일 이어 3월 5일 학생단에서 제2회 독립운동을 할 것을 대략적으로 결정하였다 2) 독립선언 3월 1일 오후 2시 무렵 민족대표자 33인 가운데 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 4명을 제외한 29인이 명월관에 모였다. 이갑성은 사람을 시켜 조선총독부에 의견서를 제출케 하 고, 이종일은 독립선언서를 볼 수 있게 탁상에 약 100매를 놓았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은 생 략하고 한용운이 일어나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어 크게 경하합니다. 더 한층 독 립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인사말을 하고 일동은 일어나 만세를 삼창하였다. 식탁에 앉으려고 할 때 일경들이 들어와 민족대표들을 체포하였다. 3) 3월 1일 독립만세 3월 1일 정오 이후 학생들을 비롯하여 수만 군중이 파고다공원에 집결하였다. 오후 2시 30 분경 파고다공원 육각당에서 경신학교 정재용(鄭在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조선의 독 립국임을 선언한다고 하자, 군중은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또는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일제정부 및 세계 각국에 ‘조선인은 모두 독립 자유민이다. 조선은 한 독립국이 될 것을 요망 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만세 군중들은 파고다공원 앞에서 동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서쪽으로 이동한 군중들은 종로 1정목 전차 교차점에서 나뉘어졌다. 한 갈래는 남대문 역 전·의주통·정동·미국영사관·이화학당·대한문·광화문·조선보병대·서대문정·프랑 스영사관·서소문정·장곡천정을 지나 본정 2정목 부근에 이르러 경찰관 제지로 대부분은 해산하였다. 다른 갈래는 무교정·대한문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미국영사관에 갔 다가 다시 대한문 앞에 이르렀다. 다시 한 군중들은 광화문·조선보병대·서대문정·프랑스 영사관·서소문정·장곡천정을 거쳐 본정으로 들어갔다. 다른 군중들은 무교정·종로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