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page

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85 로 가는 도중 마전 헌병 주재소 앞에서 주도자들이 헌병들에 체포되고, 시위대 는 해산되었다. 3월 29일 적성면 장파리에 사는 한은동韓殷東이 장파리 구장 유병성柳秉性의 집에서 유병익과 우춘산 등과 함께 시국에 관한 토론을 하고, 3월 31일 밤 20여 명이 동리 뒷동산에 모여 횃불을 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1일 오전 7시 중면 삼곶리에 약 4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였다. 나용 기는 태극기를 흔들며 앞장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대열을 이끌어 면내로 향 했다. 그 전날인 3월 31일 중면 적거리의 나용기 羅龍基 와 이홍식李洪植이 시위계 획을 의논하고 각 구장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명 4월 1일 오전 7 시 경 세얄골에 집합하라”는 격문 6통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 격문을 삼곶리· 횡산리·합수리 등 면내 각 구장에게 보냈는데, 이 날 시위는 그 계획에 따른 것 이었다. 시위대가 면내 근처에 이르렀을 때 헌병대가 출동하여 대기하여 있다가 총검으로 나용기 등 주도자를 체포했고, 시위군중은 해산되었다. 4월 10일 관인면에서는 수백 명이 다랑고개에 모여들었다. 이 모임은 삼율 리에 사는 기독교인 조아당과 박용길 등이 다랑고개에 집결할 것을 촉구하는 격 문을 써서 돌린 데 따른 것이었다.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삼율리·신촌 동·남창동으로 행진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박은식은 연천 3·1운동의 결과 사망 12명, 부상 48명의 피해가 있었다고 썼다. 용인 박은식은 용인에서 13회의 집회횟수와 만 3천 2백명의 집회인수를 기록했다고 썼다. 이지원은 시위 횟수를 9회로 집계했다. 날짜별로 보면, 3월 29일을 시작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