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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83 등이 모여 4월 3일을 독립만세시위 날로 정 했다. 4월 3일이 되자 수십 명의 주민들이 모여 들었다. 김용식이 선두에 서서 태극기 를 들고 대열을 이끌며 읍내를 향해 행진 했다. 읍내로 가는 도중에 있는 마을들에서 합류하여 주민들은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한강 대안에 이르러 강가에서 태 극기를 흔들며 만세삼창을 크게 외쳤다. 하 지만 강을 건널 배가 없어서 강가에서 만세 를 부른 후 해산했다. 4월 3일 북내면의 시우를 접한 일제는 폭발적인 시위양상을 억누르기 위해 오금리·현암리에서 45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현암리 주민 200여 명은 곤봉을 들고 돌을 던지며 항의하였다. 일제 헌병은 총기를 발포하여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 과정에서 3명이 목숨을 잃었고, 1명이 부상하였다. 연천 일제강점기 연천군 지역은 6.25전쟁 이후 관할 구역 일부(삭녕면 등)가 휴전선 이 북에 남아 있게 되었다. 박은식은 연천군 집회횟수는 3회, 집회 인원은 1,200명 이라고 했다. 이지원은 모두 13회의 시위가 있었고, 3월 21일 (2회) , 22일(2회), 27 일 (4회) , 30일 (1회) , 4월 1일(2회), 그리고 4일과 10일에 각각 1회씩 시위가 일어 났다고 했다. 아래에서는 3월 21일, 29일, 31일, 그리고 4월 1일, 10일 시위를 살 펴보겠다. 원필희 사진(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