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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중 앞에 나서 “면내로 가려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니, 군중들은 전부 손을 들 었다. “모두 가려면 가자”, 또한 “면내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제창하여 최대 현이 앞장서서 면내를 향하여 행진하여 고읍면 옹암리瓮岩里와 용암리龍岩里 사 이의 작은 언덕까지 행진하다 일본 헌병대와 마주쳐 최대현은 체포되고 시위대 는 해산되었다. 같은 날 지제면 곡수리에서도 3천여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여주 박은식은 여주의 집회횟수와 집회인원을 2회 천명으로 기록했다. 이지원은 여 주에서 4월 1일부터 3일까지 각각 2회식 모두 6회 시위가 있었다고 집계했다. 4월 1일 금사면金沙面 이포리梨蒲里 에서 3,000여 명의 군중이 헌병주재소 를 습격하여 크게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 3일 북내면 北內面에서 오금리五今 里 ·오학리五鶴里 일대의 시위와 천송리川松里 ·당우리堂隅里에서 시위가 일어났 다. 오금리·오학리 일대의 시위는 경성공립농업학교 원필희元弼熙·이원기李元 基 가 주도하여 시위계획을 세우고, 여주 군내의 각 면으로 태극기를 들고 다니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전파하였다. 이들은 심상의沈相義 ·이원문李元文· 조경호 趙經鎬 등의 마을주민들과 시위일을 4월 5일 장날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읍내 다락문 앞으로 모이라는 격문을 각 동리에 돌리는 한편, 시위 날짜를 4월 3일로 앞당겼다. 4월 3일 공북拱北학교 마당에 8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모인 군중은 지도자들의 인도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여주 읍내를 향해 행진하 여 오학리에 이르렀다. 또 천송리·당우리에서는 신륵사神勒寺 승려 인찬仁瓚 김용식金容植의 주도 로 천송리의 권중순 權重純·조규선曺圭善 과 당우리의 조석영曺錫永·조근수趙根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