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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77 경기도장관이 정무총감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3월 28일 광적면사무소 부근 의 시위 상황과 인명 피해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약 7백명의 군중 집단이 오후 4시 경 헌병 5명이 도착하여 해산을 명했으나 헌병에 반항하여 투 석했고, 헌병이 발포하여 사망 3명, 그리고 인원 미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오 후 6시 경 해산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후 4 시경 광적면廣積面 면사무소가 있는 가납리佳納里에서는 백남식 白南軾·김진성金 辰成 ·이용화李龍和 등이 주도하여 350여 명의 주민과 함께 광적면사무소에 집결 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헌병이 제지하자 일단 해산하였다 가 다시 400여 명이 가납리의 추교시장楸橋市場에 재집결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 였다. 일본 헌병을 대동하고 왔던 면장 이하용 李河鎔이 뒤로 도망하자 시위대는 일본 헌병과 면장 이하용에게 돌팔매질을 시작했고,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하 여 발포하여 백남식·김진성·이용화 등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 였으며, 오후 6시경 해산하였다. 28일에도 안종규·안종태 형제는 농민 김대현金大鉉·이사범李士範·조필 선 趙弼善 등 주민 600여 명과 함께 오산리梧山里 대들벌에서 시위한 후 백석면사 무소까지 행진하여 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3월 28일 장흥면 長興面 의 면사무소가 있는 교현리橋峴里에서도 오후 8시경 이회명 李會明 등이 주동이 되어 동리민 수십 명과 함께 동리 주점에 모여 만세시 위를 불렀다. 29일 이른 아침 이민이 다시 모이자 이회명은 태극기를 들고 선두 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였을 때 시위대 는 3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정윤삼鄭尹三·김순갑金順甲·김완순金完順이 이들을 이끌었다. 일본 헌병이 급히 출동하고 헌병보조원이 총기로 위협하자 시위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