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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본 헌병은 시위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여 앞장서 시위를 이끌던 이달용 등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이재혁 등 7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김필규 등 5명 이 체포되었다. 3월 24일 진접면 금곡리에서 청년 13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 렀다. 3월 26일 이담면伊淡面 동두천東豆川 시장에는 10여 개의 마을 주민 1,300 여 명이 집결하였다. 이는 동두천 장날을 기해 배재학당 학생 정원이鄭元伊가 중 앙과의 연락을 맡고, 한원택 韓元澤과 박창배朴彰培 등이 중심이 되어 선언서와 태 극기를 만들고, 3월 26일을 거사일로 잡는 등 준비에 따른 것이었다. 동두천 시 장 시위대는 홍덕문 洪德文이 지휘하여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신공우申公雨 에게 선언서에 서명케 하고 시위 대열에 앞세워 아래장거리, 동두천역 앞 등지를 돌 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동두천 헌병분견소는 자체 병력으로 저지가 불가능해지 자 주내면의 본대에 증원병을 요청하였다. 증파된 기마 헌병이 칼을 빼고 저지 하려 하니 선두에 섰던 박경필 朴慶弼·고복돌高福乭 이 말의 다리를 몽둥이로 후 려쳐 쓰러뜨렸고, 이 과정에서 주모자 7명이 체포되었다. 3월 27일 백석면 白石面 연곡리蓮谷里 에서 구장 안종규安鍾奎와 그의 형 안종 태 安鍾台 가 시위를 주도하였다. 안종태는 “조선은 일본에게서 독립할 수 있다”고 말하며 주민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또 같은 날인 3월 27일 구리면九里面 상봉리上鳳里에서 주민 30여 명이 만 세 시위를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에 19명이 체포되었고, 28일 오후 5시경 에는 아천리 峨川里에서 이강덕 李康德과 심점봉沈點奉 등의 주도로 이민 수십 명 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이웃한 토평리 土坪里와 교내리橋內里를 돌면서 만세시위 를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