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age

74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14일 사이에 64개 마을에 걸쳐 ‘확실히 검거를 기하기 위해’ 주로 야간에 검거를 실시하여 약 800명을 검거하고, 19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17개소에서 총 276 호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 일제는 그해 6월 1일 세번째로, 하사 이하 36명의 군 병력을 투입하여 경무 관헌과 합동 검색을 폈다. 그 결과 수백명을 구속하여 고 문을 가하고 127명을 기소하였다. 양주 일제강점기 양주군은 오늘날 양주시, 구리시, 남양주시, 동두천시, 의정부시로 분리되었다. 또 노해면과 구리면 일부는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박은식의 한국독 립운동지혈사에는 양주군의 시위가 빠져 있다. 이지원의 집계에 따르면, 양주군 의 시위는 모두 13회이다. 그리고 날짜별로 보면 3월 14일, 15일(2회), 18일, 26일, 27일 (2회) , 28일, 29일(4회), 30일이다. 아래에서는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그리 고 18일, 24일, 26일부터 31일까지, 그리고 4월 2일 시위를 소개한다. 3월 13일 미금면 평내리 구장 이승익李昇翼 주도로 시위가 열렸다. 그는, 당 시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독립운동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반일시 위 확산을 막기 위해 총독 (長谷川好道)이 일선 기관을 통해 배포한 ‘대국민 담화 문’인 고유문 告諭文을 동리민들에게 낭독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소집하였다. 고유문은 “주민들이 유언비어에 휩쓸려 광분하지 말 것이며, 일본의 한국 지배 는 변경의 여지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100여 명의 주민들은 고유문의 내용을 야 유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다음날 14일에 이민里民 150여 명이 다시 집결하여 평내리에서 만세를 부 른 후 면사무소가 있는 금곡리金谷里 방향으로 행진하던 도중 일본 헌병이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