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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71 으로 안성군으로 통합되었다. 박은식은 안성·양성·죽산의 집회횟수와 집회인 수를 각각 13회 1,800명, 7회 3,500명, 6회 3,000명이라고 소개했다. 4) 이지원은 3 월 11일 (1회)을 시작으로 3월 30일부터 4월 3일에 이르기까지 5일간 집중적으로 시위가 열린 것으로 집계하였다. 이제 날짜별로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3월 11일 읍내면에서 50명의 시위가 있었다. 3월 12일에도 시위 움직 임이 있었으나 사전에 저지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시위가 3월 30일부터 전개 되었는데, 그 며칠 전부터도 소규모 시위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례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3월 28일 읍내면 동리 날품팔이하는 서순옥徐 順玉(36세) 이 이민 약 20명과 같이 동리에 있는 산 위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 고, 계속해서 만세시위를 하다 4월 1일 많은 이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 며 동리·서리·장기리를 돌아 다녔다. 또 3월 29일 읍내 장기리에서 음식점을 하는 진공필陳公弼(40세)이 이민 수십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30일 시위가 본격화되었는데, 읍내면 동리·서리·장기리에서 500~ 600명이 조선독립운동을 외치며 읍내를 시위하다 군청에 쇄도했다. 자정 무렵 까지 경찰서에 투석하고 면사무소와 군청을 공격하는 등 시위가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또 이날 이곳 장터의 상인들이 일제히 폐점에 들어갔다. 3월 31일에는 읍내에서 3,000명의 시위군중이 군청과 면사무소를 습격하 고 파괴하였으며 등불행진을 하였다. 일병 6명이 출동하여 약간 명이 붙잡혀 갔 다. 4월 1일 안성읍내에서 500명이 시위했고 일병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하고 1 명은 체포되었다. 3월 28일의 원곡면 내가천리의 이시련李時連의 집에서 모여 의논하여 가 4) 안성·양성·죽산으로 구분하여 따로 기록한 것은 역시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