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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63 은 자신이 범한 죄가 있어서 여기에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먼저 그의 집 을 부숴 버리라”고 하며 앞장서서 1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최성옥·전원순 등 과 함께 계양면 선주지리仙住地里 이경응의 집으로 몰려가서, 그 집을 파괴했다. 수원 일제강점기 수원군은 지금의 수원시, 화성시, 오산시, 의왕시로 분리되었다. 박 은식은 수원군 집회횟수는 27회, 집회 인수는 11,200명이라고 했다. 이지원은 시 위 횟수를 20회로 집계했는데, 3월 23일, 25일(2회), 26일부터 28일까지 각 1회, 29일 (4회) , 31일(6회), 30일과 4월 1일, 3일, 15일 각 1회라고 했다. 3월 1일 수원 북문 안 용두각에 수백 명이 모였는데, 경찰이 해산시키니 군 중은 해산하는 척 하다가 만세시위를 시작했다. 만세소리를 듣고 모여든 군중이 수천 명이었다. 성호면에서는 3월 14일 오산리에서 시위 움직임이 있었으나 일 제의 경계로 불발되었다. 3월 16일 장날을 이용하여 팔달산 서장대와 동문 안 연무대에 수백 명씩 모여 만세를 부르며 종로를 통과하여 시위행진을 하는데 경찰이 소방대와 헌병 과 합동으로 시위를 제지하고 주도자를 검거하였다. 주도자들을 검거하자 시내 상가는 전부 철시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검거하였던 사람들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23일 수원역 부근의 서호 西湖에서 700명이 시위를 벌이다가 수원역 앞 에서 일제 경찰과 헌병대, 소방대의 제지를 받고 해산했다. 3월 25일 수원 장날 을 맞아 면내에서 약 20명이 시위를 벌여 6명(10명이라는 설도 있음)이 붙잡혀 갔 다. 이튿날인 3월 26일, 전날의 시위에서 만세 시위자들을 잡아 가둔 데 항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