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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속되었다. 4월 1일 중서면의 곡령리에서는 수십명의 청년들이 망치와 곤봉 등으로 무 장을 하고 시위를 벌였다. 허내삼許 迺 三 이 이끈 시위대는 일전불사의 각오로 나 아가 만월대를 지나 북본정 당교 堂橋 앞에서 일제 경찰과 충돌하였다. 이들은 총 칼로 위협하는 일제 경찰에 맞서 돌을 던지며 대항하며 격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결국 총칼의 위협 앞에 주도자들 17명이 체포되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4월 1일부터 영북면에서도 4월 6일까지 길수리 주민들의 주도로 여러 차례 시위가 있었다. 4월 6일 홍교면에서는 사곡리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일제 관헌의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앞의 <표2-1-1>)에 따르면, 개성의 인명 피해 는 부상 140명, 투옥자 76명이다. 고양 고양군의 시위는 오늘날 서울로 편입된 용강면·은평면·한지면·독도〔뚝섬〕 면·연희면·숭인면과 신도면 일부(구파발리·진관리)를 비롯하여 지금의 고양시 에 속하는 지도면·신도면·송포면·중면·벽제면에서 벌어졌다. 박은식은 고양군의 집회 횟수가 19회, 집회인은 2,500명이라고 하였다. 이 지원은 고양군의 시위횟수가 21회라고 집계했다. 3월 23일 (6회) , 24일(5회), 25일 (1회) , 26일 (4회) , 27일(5회)이다. 5일에 걸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특징이 있다. 그 가운데 지금 고양시에 속하는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을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3월 24일에는 지도면 행주리幸州里 주민 800여 명과 신도면 능내리陵內里 주민 500명이 만세를 불렀다. 또 같은 날 중면 일산리 一山里 에서도 군중 160여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