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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연구 동향과 과제 27 순국자 묘 역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한편 일본 NHK에서 1990년 3월에 방영한 『삼일운동사』 역시 제암리 지역의 만세운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이 방송에서는 당시 일본인 사사카의 고향 및 아들을 찾아 그들의 이 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아울러 당시 향남면사무소에서 보관하고 있던 토지대장 을 통하여 당시 발안일대에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 및 간척사업 등에도 주목하고 있어 이 지역 3·1운동사를 연구하는 데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있어 신선미를 더해주고 있다. 한편 외국인의 눈을 통해 제암리 사건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연구도 있어 신선감을 더해주고 있다. 김승태의 「일제의 제암리교회 학살·방화 만행과 서구 인들의 반응」(『한국기독교와 역사』 7)이 그것이다. 씨는 주한 미국인들에게 보낸 실 (Sill)의 회람장(1897. 5. 11), 주한 미국영사 커티스(Curtice)의 수원지방 출장 보고 서 (1919. 4. 21), 주한 영국 대리총영사 로이즈의 제암리 현장 방문(1919. 4. 19) 기 사, 주한 프랑스 부영사 갈루아 (M. F. Gallois)의 보고서(1919. 5. 20) 등의 원문을 번 역하여 영국, 미국, 프랑스 영사관의 반응과 역할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이어서 재한 선교사들의 반응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노블 부인의 일기, 노블 선 교사의 연례보고서,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의 항의서 (1919. 7. 10) , 영국외무성 의 “일본 만행에 대한 보고서” 등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서구의 민간 여론과 해 외에서의 반응에서는 〈뉴욕 타임즈〉 (The New York Times) 1919년 4월 24일자 기 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일본인들의 반응에서는 일본인 기독교인 영문학자 사이토 타케시 齋藤勇가 일제의 제암리교회 학살 방화 만행 사건의 보도를 접하 고 1919년 5월 6일 지어 5월 22일자 교계신문인 〈복음신보〉에 발표한 “어떤 살 육 사건”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