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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 판결문을 통해 본 경기지역 3·1운동 267 시위는 54회로 압도적이다. 이 시기 일제의 대응은 ‘진압’이었다. 3월 1일 군대가 출동했는데, 서울에 보 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 평양에 보병 1개 중대, 선천에 보병 1개 소대였다. 그 외 헌병경찰, 소방대원을 비롯하여 금융조합 직원, 일본인 민간인(재향군인) 등 까지도 동원되었다. 총기를 사용한 유혈진압은 평남북에 집중되었고, 가혹한 진 압으로 7일부터 시위 발생 지역, 횟수, 참가자수가 감소되었다. 참고로 이지원이 그의 논문 (이지원, 「경기도 지방의 3·1운동」, 『3·1민족해방운동연 구』, 청년사, 1989) 에서 정리하여 작성한, 이 시기 경기 지역의 날짜별·지역별 3·1 운동 발생 상황을 소개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3-1> 개시국면 각군별·날짜별 시위횟수 구분 3.3 4 5 6 7 고양 부천 시흥 1 수원 진위 안성 용인 이천 김포 파주 개성 1 1 1 1 1 포천 연천 광주 양평 양주 가평 여주 장단 출전: 이지원, 「경기도 지방의 3·1운동」, 『3·1민족해방운동연구』, 청년사, 1989, 313~316쪽에서 발췌 정리하였음. 주: 발췌 과정에서 현재 경기도에서 분리된 인천·강화는 제외하였고, 참가자수는 생략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