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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제암리 고주리 학살사건 유적지 향남면 발안리 3·1만세시위의 현장이었던 발안천변 발안장터 소재지: 발안 발안천변 종류: 만세운동지 내용: 1919년 3월 31(30)일 발안 장터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이다. 만세운동 날짜에 대하여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3월 31일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명은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때 일제 경찰의 발포로 면민 3명이 사상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흥분한 시위군중이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면서 시위는 점차 가열되어 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던 사사카(佐坂)를 비롯한 일본인 43명이 30리밖의 삼계리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정미업자 사사카는 그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사건 당시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4월 1일에도 발안장 주변의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인들은 발안 장날 시위에 참가한 후 지속적인 시위 방법으로 야간 횃불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4월 2일 수요일 저녁 예배를 마친 후 ‘남포등’을 들고 지네산으로 올라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발안 장날 시위와 그후 전개된 야간 횃불시위에 적극 참여했던 제암리 지도자들에 대한 정보는 3·1 운동 당시 제암리에 살다가 발안으로 이사한 순사보 조희창에 의해 일본 경찰 조직에 그대로 보고되고 있었다. 이들도 일제의 검거를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의 검거과정에서 빚어진 것이 제암리사건이다. 고문 받은 애국지사들이 버려진 발안 천변 소재지: 발안 천변 내용: 일제는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을 발안주재소와 화수리병참주재소로 끌고가 고문을 가하였다. 그리고 발안천변에 내다 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