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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⑪ 군인들이 마을 건너편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여섯 명을 나무에 묶고 총 살했다. ⑫ 이날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모두 29명으로 제암리에서 23명, 고주리에 서 6명이 살해되었다. 제암리 희생자에 대해서는 각 자료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나온다. 교회내 희생자의 경우 조선총독의 본국 보고에는 23명, 조선군사령관의 육군대신 보고 에는 29명 사망, 당시 목격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병헌의 [수원사건』에서는 천도 교 13명, 기독교 12명 등 계 25명, 미국총영사의 보고서에는 37명(기독교인 10명, 천도교인 25명, 교회 밖 희생자 2명) , 윤치호 일기에는 35명 등이다. 한편 제암리 교회에서 주민들을 참살한 아리타는 곧바로 향남면 고주리로 향하였다. 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0분 거리 밖에 안되는 가까운 마을이었다. 당시 고주리 주민들은 제암리의 참변을 보고 대부분이 산속으로 피신한 후였다. 그러나 발안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김흥렬 일가는 ‘그놈들도 사람인데 죄 없 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못하겠지’하는 생각으로 온 가족이 피신하지 않고 그대로 집에 있었다. 수비대는 유일하게 남아있던 김흥렬의 집으로 들이닥쳐 김 흥렬을 비롯 집안에 있던 김성렬, 김세열,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등 일가족 6명 을 포박하고 백낙열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김흥렬이 대답을 하지 않자 아리타는 김흥렬 가족을 짚단과 나무로 덮어놓고 석유를 뿌린 후 생화장을 했다. 당시 상 황을 이병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인동 (고죽골) 천도교인 김흥렬씨 집으로 가서 김성열, 김세열, 김주남, 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