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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그리고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고 있던 사사카佐 坂 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아리타는 순사 1명에 보병 2명을 붙여 주 력 부대 반대편으로 먼저 보내 주민들의 퇴각로를 차단하였다. 마을에 도착한 후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의 성인 남성들을 교회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 리고 엄청난 살육이 저질러졌다. 당시의 학살상황을 정한경은 「한국의 사정」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목요일인 4월 15일 낮 몇 명의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와 강연이 있을 터이니 모 든 남자 기독교 신자와 천도교 교인들을 모두 교회로 집합하라고 알렸다. 29 명의 남자들이 교회에 가서 안에 들어앉아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고 웅성 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종이 창문 틈으로 군인들이 교회를 완전히 포위하고 불 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죽거나 심하게 다쳤 을 때에도 일본 군인들은 이미 불길에 싸인 교회 건물에 계속 불을 붙였다. 그 속에 있던 사람들은 탈출을 기도했지만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교회 밖에는 이같이 탈출하려다 목숨을 잃은 6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남편이 교회에 불려 갔는데 총소리가 나자 놀란 두 명의 부녀자가 남편에게 무슨 일 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달려와 군인들의 틈을 비집고 교회로 접근하여하 자 그들을 무참하게 죽여 버렸다. 19세의 젊은 부인은 칼에 찔려 숨지고 40세 를 넘는 다른 한 여자는 총살당했다. 그들은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군인들은 그런 다음 온 마을에 불을 지르고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교회 안에 갇힌 주민들과 마을 주민들에게 자행된 만행의 진상은 자료에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