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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예배를 마친 후 ‘남포등’을 들고 지네산으로 올라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발안 장날 시위와 그 후 전개된 야간 횃불시위에 적극 참여했던 제 암리 고주리 지도자들에 대한 정보는 3·1운동 당시 제암리에 살다가 발안으로 이사한 순사보 조희창에 의해 일본 경찰 조직에 그대로 보고되고 있었다. 이들 도 일제의 검거를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의 검거과정에서 빚어진 것이 제암리사 건이다. 그 후 4월 15일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향남면 발안장에서 군중 약 400 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에 놀란 발안 주재 순사는 아리타有田俊夫 보병중위와 협력해서 이들을 해산시켰다. 한편 일본측 보고에 따르면, 일본측은 발안장에 거주하는 일본인 남자 9명 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경찰관 주재소 순사 (일본인 2명, 한국인 4명) 그리고 일본 병 사 4명과 더불어 철야 경계를 하게 하였다. 당시 분위기는 마치 적중에 포위된 느낌이었다고 하며, 그 후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피난민을 복기시켰던 것이다. 3·1운동 당시 발안소학교에 재학 중이던 사사카 리키치의 아들 시즈오는 3·1운 동 당시 자신들이 느꼈던 기분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삼일만세 사건 당시 발안에서의 생활은 두려운 나날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산에 모여 나무를 베어 봉화를 피웠죠. 그리고 밤새도록 대 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발안 중심가를 둘러싸고 말이죠. 당시 제 부친은 발안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었으므로 저의 집이 경비 의 중심이 되었죠. 집에는 어린 저라든가 어머니를 비롯해 부녀자가 살고 있었 기 때문에 당시 수원에 상주해 있던 수비대가 10명 정도 파견돼 와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