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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223 제암리 학살사건의 배경 1919년 3월 하순 수원군 수원읍내 및 성호면 오산리에서 전개된 격렬한 만세운 동은 4월 상순의 이 지역 만세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우정면, 장안 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약 1천여명이 우정, 장안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파괴 하는 한편 화수리 주재소를 전소시키고 일본순사를 죽이는 등 공격적인 만세운 동을 전개하였다. 참여인원도 약 2천명에 달하여 일본인들을 경악시켰다. 공격적인 만세운동에 놀란 일제는 남양, 의왕, 사강 및 진위군 내 서정리, 안중, 봉남, 백봉 등 8개 경찰관 주재소를 일시 철수시키는 등 치안확보에 절치 부심하였다. 그러나 그 후 만세운동이 진정기미를 보이게 되자 일제는 일단 안 도하였다. 다만 발안장 지역만은 만세운동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곳 발안장터 에서는 3월 31일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명이 장날을 이용하여 구한 국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때 일제 경찰의 발포로 면민 3명이 부상 을 입었으며, 이중 이정근 의사가 순국하기도 할 정도로 만세운동은 치열하였 다. 이러한 과정에서 흥분한 시위 군중들은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는 한편, 다 음날인 4월 1일 오후 11시에는 발안장 심상소학교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일본 인 가옥도 방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발안에 거주하며 인근에서 간척사업을 하 던 이 지역 일본인 거류민 단장 사사카佐坂를 비롯한 일본인 43명이 30리 밖의 삼계리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4월 1일에도 발안장 주변의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인들은 발안 장날 시위에 참가한 후 지속 적인 시위 방법으로 야간 횃불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4월 2일 수요일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