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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로 점차 회복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수촌리의 백낙열은 삼괴지역, 김성렬은 팔탄면 고주리, 이 병기는 팔탄면 노하리의 포교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1910년에는 수촌리를 비 롯하여 독정리·어은리·장안리·화산리·이화리·덕목리·고주리·매향리 등 8개 전교실을 설치 관장하였다. 특히 남양교구는 1909년 8월 전국에서 성미 납부 성적이 우수하여 1등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한편 1910년대 들어 전국지역에 교리강습소를 설립, 근대교육활동을 실시 하자 수원과 삼괴지역에서는 율북면 불정리에 309강습소, 공향면 제암동에 310 강습소, 압정면 사기촌에 제446강습소, 수원군내에 544강습소, 634강습소, 음덕 면 북동에 733강습소, 장안면 장안리에 734강습소 등 7개의 강습소를 운영하였 다. 이러한 천도교의 조직은 훗날 수원지역 3·1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특히 천도 교는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1910년부터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를 위해 손 병희는 지방의 중진 교역자를 중앙으로 불러 49일간 정신적 수양을 시키는 한 편 민족의식을 함양시켰다. 수원지역에서는 이종석, 정도영, 김정담, 이규식, 이 민도, 한세교, 김흥열, 김창식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3·1운동 당시 앞장서서 교인들을 지도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괴지역, 특히 제암리는 천도교와 기독교, 기 독교와 천도교가 일찍이 전파되었으며, 천도교 지도자는 동학혁명과 비밀결사 를 통해, 기독교 지도자들은 구국동지회 등 비밀결사를 조직하면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리하여 이들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삼괴지 역 만세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