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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221 중심한 강력한 지도세력을 구축하였고, 교회 외에 강습소까지 설립하여 부녀자 를 대상으로 한글 교육까지 실시하였다. 제암(두렁바위)교회는 1911년경 초가 예 배당을 마련하였으며, 1912년에는 인근 해창교회를 흡수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제암리·고주리의 천도교 수원지역에 동학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1880년경이었다. 수원지역에 동학 을 전래한 주요인물은 서인주와 안교선이다. 서인주는 수원출신으로 1883년 3 월 김연국·손병희 ·손천민·박인호 등과 함께 최시형을 방문할 정도로 교단 의 핵심인물이었다. 안교선은 호남출신으로 1883년 최시형이 경주에서 『동경대 전』을 간행할 때 윤상오와 같이 유사로 참여하였다. 그는 1884년 2월경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에 동학을 포교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수원지역의 동학은 1892년과 1893년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 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교조신원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수원지 역의 동학은 1894년 동학혁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1894년 9월 18일 반외 세의 봉기령에 따라 즉각 기포하였으며, 일본군이 이들 동학지도자를 체포하려 하자 동학군은 잠시 후퇴하였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이 처럼 수원이 크게 위협받자 정부는 일본군을 긴급히 증파하여 줄 것을 요청하 였고 일본군이 즉시 투입되었다. 결국 수원의 동학군을 지휘한 안승관과 김정현 은 피체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남벌원에서 효수되었으며 수원성에서 체포된 김 원팔도 효수되었다. 그리고 남양지역의 동학군도 백낙열과 김흥렬의 지휘 하에 수원의 고석주, 김정현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동학혁명 이후 한동안 동학 세력 이 쇠퇴하였으나 수원지역은 안성출신의 김한식, 남양지역은 백낙열의 노력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