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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창·김우권·이창회·김광식·한창섭 등이 남양구역을 담당했고 이어서 1914 년부터 김교철, 1918년부터 동석기 목사가 구역을 담임하고 있었다. 남양구역이 수원지방회에 편입된 것은 1907년부터이다. 따라서 3·1운동 당시 수원지방의 목 회자들을 보면 지방 감리사에 노블(W. A. Noble), 수원읍(현 수원 종로) 교회에 임응 순, 오산구역에 김광식, 남양구역에 동석기 목사가 각각 시무하고 있었고 김교 철은 ‘본처 목회자’로 수촌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 수원지방의 한인 목회자들 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 지역 만세시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경기도 수원군 (현 화성시) 향남면에 위치한 제암리는 속칭 ‘두렁바위’로 불리 는 조선 후기 전형적인 씨족 중심의 농촌 마을이었다. 3·1운동 당시 전체 33가구 가운데 2가구를 제외하고 순흥 안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으며, 주민 대부 분이 농업에 종사하였다. 제암교회는 이 마을의 안종후가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후 1905년 8월 5일 자기 집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린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제암리의 토착 세력인 안씨 집안에서 복음을 처음 받아들여 다른 성 씨 집안에도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그리스도회보』에 실린 제암교회 소 식에서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외에 한말 ‘구한국 부대’ 군인으로 있다가 1907년 군대 해산 때 충남 지 역 항일 의병운동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던 홍원식도 1914년 인근 청북면 판교리에서 이곳 제암리로 옮겨 온 후, 제암교회 권사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제암리에서 ‘서재’를 세우고 계몽 교육을 실시하면서 제 암리 교회 지도자 안종후, 고주리 천도교 지도자 김성렬 등과 ‘구국동지회’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어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처럼 제암리교회는 안종후·홍원식 권사와 김정헌·안진순 속장 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