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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217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여주의 원필희의 경우, 본래 손병희를 따랐으며 여주군 의 독립만세운동 책임자로서 군내 각 면으로 돌아다니며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 정신을 고취하여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도록 계몽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민족 대표와 일정한 연계성이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천도교 장로 홍병기洪秉箕의 경우 금사면 이포리 출신이므로 이 지역의 만세운동과 연계 가능성도 생각해 볼수 있을 듯하다. 셋째, 경기도 지역의 3·1운동의 경우 3월 하순 이후 운동이 마을에서 마을로 확산되는 데에는 향촌사회 전래의 리체계가 활용되었고, 이에 비례하여 이장 (구 장) 들의 역할이 현실적으로 크게 작용하였다. 여주지역의 경우도, 4월 3일 장암 리 이장 원도기의 집에서 김학수, 원필희 등이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점을 통해 볼 때, 이장이 이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여주지역의 3·1운동의 경우 타 경기도 지역과 같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청년학생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원기와 원 필희의 경우, 1919 년 당시 경성농업학교 학생으로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주 도하였던 것이다. 다섯째, 여주지역 북내면의 만세운동의 경우 공북학교 졸업생도 참여하였 다. 이원문의 경우 1916-1918년에 공북학교를 졸업하였다. 여섯째, 3·1운동을 계획한 조병하의 경우, 기독교인이면서 당시 군청에서 양잠기사로 근무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는 여주군 여주읍 홍문리 출신으로, 1915년 여주 감리교회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17년 개성잠업학 교를 졸업한 후 여주 군청에서 양잠기사로 근무하였던 것이다. 56) 56) 아들 조태환이 작성한 조병하 독립유공자평생이력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