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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1인씩은 나와서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방화한다.”고 협박한 것으로 기 억한다는 취지의 기재. 라고 하여, 4월 3일 자신이 “집집마다 반드시 1인씩은 나와서 만세를 부르라. 그 렇지 않으면 방화한다.”고 만세를 독려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최영무의 활동은 면서기 견습 김학수 신문조서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1. 사법경찰관의 피고 김학수 제2회 신문조서에 4월 3일 자기들이 원도희 집에 서 기를 만들고 있는데 최영무가 와서 “만세를 부르자.”고 하기에 그와 합류 하였으며, 자기와 이원기·원필기는 최영무와 같이 장암리·외룡리·덕산 리의 각 동리를 선동하고 돌아 군중과 함께 당우리로 갔다. 그때 면장 조석 영이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최영무는 만세를 부를 것을 강요하였다. 여기서 위의 군중은 이곳을 출발하였는데, 도중에서 십수 명의 군중은 곤봉 혹은 작대기를 들고 행렬의 전후에서 낙오자가 없도록 독려하고 있었다. 자 기도 군중을 지휘 감독하였다는 취지의 기재. 한편 이원기는 제5회 신문 조서에서, 최영무와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다음 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사법경찰관의 피고 이원기 제5회 신문조서에, 4월 3일 원도희 집에서 김학 수 및 원필희와 함께 기를 만들고 있는데 최영무가 와서 당신네 학생도 기 를 넘겨주고 같이 만세를 부르라고 하기에 장암리를 선동하고 돌아왔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