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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게 교부하니, 그는 김봉수란 자에게 배부할 것을 부탁하였다. 피고 원필희· 강영조는 경고문 작성을 돕지는 않았으나 그 곁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이어 서 이튿날 2일 이원문 집에서 동인 및 강영조와 상의 후 5일의 시위운동 때 사용하기 위하여 자기 소유의 일장기를 고쳐서 증 제5호의 기를 만들었으 며, 동 3일 북내면 장암리 구장 집에서 김학수·원필희와 공모한 끝에 증 제 1호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날 밤 최영무·강만길·최명룡 등이 이 민들을 규합하고 있기에 그들을 따라갔더니 최영무는 이민에게 대하여 “출 동하지 않으면 방화한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공북학교로 가 서 군중 약 300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여주를 향하여 출발하 였다는 취지의 공술. 이원기의 법정 진술을 통해 볼 때, 이원기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 128번지 농업 조경호가 여주로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여주 사람들이 만세운 동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힐난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이에 적극 나서게 되었 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기초한 경고문의 내용이 다음과 같다고 증언 하고 있다. “경기도 각지에서는 독립시위운동을 시작하였으니 이 기회에 여주군에서도 오는 4월 5일의 읍내 장날을 기하여 독립운동을 행할 터이므로 그곳의 다락 문 앞으로 집합하라.” 한편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군중들을 지휘한 최영무는 법정에서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