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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209 외룡리를 넘나들며 마을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어 이기원, 김학수도 최영무 등을 따라 각기 마을사람들에게 만세운동을 권유하였다. 그 결과 4월 3일 북내면 당우리 공북학교 마당에 약 300명이 모였다. 이 때 이원기등은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면서 여주 읍내로 향해 출 발하였다. 최영무는 태극기를 떠받들고 선두에 서서 군중을 인솔하였다. 그리 고 이원기·김학수·원필희·강두영은 군중들을 독려하며 여주군 북내면 오 학리까지 가서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북내면 당우리 사람들의 만세운동에 대하여 이원기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 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1. 당 법정에서 피고 이원기가 금년 4월 1일 이원문 집에서 동인 및 조경호와 같이 경고문을 작성하였다. 이날 조경호의 말에 그가 여주에서 돌아오는 도 중 경성에 사는 사람에게 들으니 “경성에서는 여주 및 이천 사람에게 먹일 것으로서 돼지먹이를 저축하여 둔 모양이다.”는 것이어서 “그러면 여주 사 람도 조선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수치가 된다.”고 생각하고서, 우선 많은 군중을 모으기 위해서 경고문을 낼 필요가 있다고 헤아려 자기가 증 제4호 의 선언서를 토대로 삼아 증 제3호의 경고문을 기초하였다. 그 글 뜻은 “경 기도 각지에서는 독립시위운동을 시작하였으니 이 기회에 여주군에서도 오 는 4월 5일의 읍내 장날을 기하여 독립운동을 행할 터이므로 그곳의 다락 문 앞으로 집합하라.”고 써두었다. 그리하여 전기한 조경호 및 이원문이 위 의 원고를 베껴서 경고문 42매를 만들어 그 중 조경호가 26매, 원필희가 1 매, 자기가 14매, 심상의가 1매를 배부하기로 되어, 자기는 7매를 이원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