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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205 에 대한 애향심과 자부심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병하는 1919년 3월 26, 7일경 여주군 주내면 홍문리 심승훈 집에서 일 반사람들에게 “각 지방에서는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하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방에서만 평정함은 무기력하니 이 지방에서도 군중을 모 아 독립만세를 외칠 터이므로 이에 참가하라”고 하였다. 한편 4월 3일에는 같 은 면 창리 이종은 집에서 보통학교 생도인 한백웅, 한돈우에게 “경성에서는 학 생이 중심이 되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금尙今 지방 학 생은 극히 평온함은 심히 유감이니 제군은 학생을 선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도 록 힘쓰라”고 권유하였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조병하는 일반인과 학생들에게 각 각 그들의 정서에 맞게 만세운동에 참여하라고 호소하는 용의 주도함을 보여주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병하의 이러한 치밀한 계획은 이를 사전에 탐지한 일제 에 의하여 와해되고. 그는 체포되어 징역 1년에 처해졌다. 출옥 후 그는 1920년 김병수와 함께 해외로 망명하였다. 조병하의 만세운동은 이웃 이천 등 타 지역 의 만세운동에 큰 영항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주변 기독교 감리교와의 연계 또한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3·1운동의 전개 북내면 3·1운동 북내면에서는 4월 3일 두 군데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하나는 천송리에서 김용 식이 주도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당우리 공북학교에서 이원기, 최영무 등이 주도 한 것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여주읍내로 행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