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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터 5일까지 약 5일에 걸쳐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인원은 1천명에서, 많이는 3 천명까지 다수의 농민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4월 1일 이포에서 약 3 천명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한 것은 주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측 정보기 록에는 이들 간단한 기록 외에 자세한 사항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여 주지역의 3·1운동을 살피는 데 있어서 현재 남아있는 판결문은 매우 중요한 자 료로서 그 일익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이번 장에서는 판결문을 통하여 그 모습 을 복원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판결문 가운데에는 여주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활 발히 전개하엿던 이포 등지에서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것은 남아 있지 않다. 그 러므로 여주지역 3·1운동의 전체적인 모습은 앞으로 이포 지역 등의 자료 발굴 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3·1운동의 계획- 여주군 주내면 조병하 주내면 52) 에서는 구체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군내에서 최초로 만 세운동이 계획되었다. 여주지역에서 처음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자 한 것은 여주군 주내면 상리의 조병하이다. 그는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기독 교인으로 당시 24세의 청년이었다. 본적은 여주군 여주읍 홍문리이다. 1915년 여주 감리회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17년 개성잠업학교에 유학하여 졸업하였다. 그 뒤 여주 군청에서 양잠기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 선언을 한 이래로 각지에서 독립시위운동을 시 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거주하는 여주에서는 아무 일 없이 극히 평정함 을 분개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자 추진하였다. 여기서 조병하의 여주지역 52) 주내면은 1941년 여주읍으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