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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99 1846년 용산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00년경 용인에는 600여명의 교우가 시 리치, 갈대, 앞고지, 배미실, 김량장 등지에 분포하고 있었다. 남곡리 주민 100여명은 한영규가 만든 구한국국기를 들고 3월 29일 남곡리 용곡동리 밤나물골(현 용동중학교 앞) 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48) 양지면 읍내로 가는 동안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9) 기흥면 3월 30일 용인 기흥면지역의 만세운동은 기흥면 하갈리에 거주하는 김구식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5월 2일 사기죄로 징역 4월에 처해졌던 인물이다. 1919 년 3월 30일 오전 10시경 김구식은 기흥읍 하길리 강가 편지에서 만세운동을 주 도하였다. 이어 오후 2시경 읍삼면 구읍내로 가서 약 30여명의 주민들에게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설득하였다. 김구식은 경주 김씨로 1881년 기흥면 하길리 300번지에서 50) 출생하였으며, 상갈리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 후 농업에 종사하던 중 기흥면 하 갈리 자택에서 하갈리 거주 이행식과 보라리 거주 조국형과 1919년 3월 28일 만 세운동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51) 기타 지역 3월 30일에는 읍내에서 2000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일본헌병의 발포로 2명 이 사망하였다. 또한 3월 31일에는 송전리에서 200명의 시위가 있었다. 또한 외 48) 밤나무꼴 3000여평에는 현재 동아엘리콘 회사가 들어서 있다. 49) 박용익선생의 증언. 50) 현재 300번지 평강 하이트맨션 102호에는 아들 김학모 (1907년생)가 살고 있다. 51) 김학성, 김정환, 김형식 등의 진술서 참조 (1989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