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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한영규의 경우 할아버지때부터 천주교를 신앙한 독실한 집안이었다. 한영 규의 부친 한윤근때 관헌의 탄압을 피하여 서울에서 이곳 남곡리로 이주하였다 고 한다. 45) 특히 한윤근의 동생인 한 바오로(한기근) 신부는 1911년 성경을 한국 어로 번역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영규는 이곳 남곡리로 피신해온 천주 교인들 가운데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만세운동 참여는 이 지역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46) 현재에도 손자 한종혁이 남곡리 에 거주하고 있으면 독실한 신자이다. 김운식은 1899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72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조 상은 조선의 천주교도들에 대한 학정을 피하여 충남 서산에서 피신하여 왔다고 한다. 김운식은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가 10여년동안 있다가 귀국하였다. 슬하 에 딸 5명을 두었으며, 셋째 (김명순, 김유스시나)와 넷째 딸이 수녀가 될 정도로 독 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47) 이 지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프랑스 신부 라 모방에 게 영세를 받은 곳이다. 또한 감대건 신부가 첫 사목을 한 지역이었고, 조선천주 교회 역사상 최초의 본당이 있던 은이공소가 이옷하고 있는 곳이다. 김대건은 1827년 정해교난때 부친 김제준을 따라 양지현 골배매실(배미실)로 이사하여 왔 다. 1827년 3월 초순 용인지방 각처에 은신해 있던 신자들이 골배매실(배미실), 은 이골 (내사면 남곡리)에서 은밀히 집회를 열고 라모방 신부를 모셔다가 최초의 미 사를 봉헌하였다. 대건은 이때 영세를 받고 안드레아라는 본명을 받았다. 1846 년 4월 13일 은이공소를 떠난 김신부는 그해 6월 5일 서해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45) 한종혁(한영규의 손자, 양지면 남곡리거주) 의 증언 46) 한영규의 손자 한종혁 (1936년생)과 가진 면담에서 청취. 47) 김 유수시나 (77세, 살루트 바오로 수도원 불암동 분원)와 가진 면담에서 청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