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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붙어있었다. 시골이니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으니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고 묵은 호박을 쪼개서 앞뒤로 붙이면 화기를 배아낸다고 그리하더니 한두 달 후 에는 완치가 되어 농사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인산 因山에 참례하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손병희선생 주도하에 일어난 서울 의 3·1운동 광경을 보고 감동하여 돌아온 박제원, 이봉현, 이은표, 김은수, 김 영달, 김성남, 이용환, 황경준 등이 이은표댁에 모여 원삼면 내에서 독자적으 로 대한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합의하고 다시 안명옥, 박제민, 박제 정, 김창연 기타 수인을 연락원으로 포섭하고 각 동리 유지에게 통지하여 “3월 20일 자정을 기하여 좌전고개 (내사면 평창리와 원삼면 좌항리 첩경지에서 최상근이 경영하던 주막집) 에서 시발하여 대한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이니, 미리 만반 준비를 갖추었다가 그 날은 산봉우리마다 봉화를 밝혀 이 취지를 전달하 는 동시 동리민을 인솔하고 시위행렬에 참가하라고 수차례에 걸쳐 연락을 해 놓고 1919년 3월 20일 자정子正을 기하여 주동자와 연락원, 그리고 각 동리에 서 모여든 유지들이 오른손에는 태극기를, 왼손에는 횃불을 들고 대한독립만 세를 외치며 좌전동래로 내리 닥치니, 여기에 좌항리, 맹리, 미평리 사람들이 미리 모여 있다가 합류하고, 여기서 역골고개를 넘어 사암리 모래실 동리 앞에 이르러 여기에 모여 있던 모래실, 넓실 사람들이 합류하고 면사무를 향하여 세 거리로 행진하는 사이에 노리개, 용담, 안골 사람들이 합류하여 고당리 면사무 소에 이르르니 면소마당과 앞 길거리에는 이미 고당리, 학일리, 문촌리, 목신 리, 독성리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합류하니 모인 군중은 천을 훨씬 넘었을 것 이라고 한다. 여기서 3·1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고도 하고, 면장 을 앞세우고 그냥 만세만을 대대적으로 부르고 다시 면장을 앞세우고 백암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