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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70여명을 모집한 뒤 용인 굴암에서 일군과 접전을 벌였다. 같은 해 9월 14일에는 포군 18명을 인솔하여 양근·안성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포군 36명을 인솔하고 죽산군 원일면으로 가 고초곡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어 11월에는 광주군 상림의 길가에서 4명, 백암 장터에서 1명 등의 일진 회원을 총살하였고, 또 죽산군 백암에서 순사와 순검 각 1명을 총살하는 등의 활 동도 벌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10일 자택에서 일군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총 살당해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 다. 평창리에는 현재 <의병장 옥영임경재상>이 서 있다. 비문은 박영석(전 국사편 찬위원회 위원장) 이 작성하였다. 여준 (1862-1932) 여준은 일찍이 오산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고향의 청소년글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삼악소학교를 원삼면 죽능리 능말에 학교를 세웠다는 설이 있다. 그 는 1906년에는 이상설·정순만·이동녕·박정서·김우용·황달영 등과 함께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교포 자녀들에게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 였다. 원삼면 지역 3·1운동의 전개 원삼지역의 3,1운동은 용인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지역이라는 측면에서 일 차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의 만세운동의 실상을 구체 적으로 파악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필자는 우선 재판기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