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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81 정주원(1870-1908) 정주원은 원삼면 하사리 출신으로 1907년 9월에 의병을 죽산군에서 일으켜 부 하 수백명을 이끌고서 1908년 5월경까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의 활동 지 역은 죽산, 양지, 수원, 안성 등지 뿐만 아니라 충청도 당진, 면천 등지에까지 이 르렀다. 29) 정주원은 1908년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황명운 죽산군 원삼면 능촌에 거주하였다. 의병장 정주원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정주원 이 체포되어 1,2심에서 사형, 3심에서 종신형을 언도받았을 때에도 투항치 않고 전국 각처에 다니며 활동하였으며, 지명수배 중 1909년 4월 20일 양지군 고동면 향림동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압송도중 저항하면서 도주를 기도하였다는 이 유로 일본군이 총살하였다. 임옥여 (임경재, 1871-1907) 내사면 평창리 사람이다. 본명은 경재, 누대로 무관장을 지낸 풍천 임씨의 후예 이다. 현재 평창리에는 임옥여의 동상이 있으며, 손자 임성빈이 대대로 거주하 고 있다. 30) 1907년 8월 이천창의소의 좌장이 되어 21일과 30일에 이천주재 일군 기병 과 교전을 벌였으며 포군 12명을 인솔하고 광주군 실촌면에 이르러 다시 포군 29) 정주원의 당진에서의 활동은 다음의 논문에 상세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정주원을 충남 당진출신으로 서술하고 있 다. 김상기, <당진 소난지도 의병항전>, 《당진 소난지도 의병의 역사적 재조명》, 충청문화연구소 제1회 학술대회, 충 청문화연구소, 충남대학교, 2003·11, 37-43. 30) 임성빈(1941년생)과 2004년 1월 16일에 가진 면담에서 청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