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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69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일제는 이 지역의 만세운동을 황 해도 수안군 수안면의 시위,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의 시위와 더불어 전국 3대 실력항쟁의 하나로 꼽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원곡 양성지역 3·1운동에 대한 평가는 결국 주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이어졌고, 24명이 순국하고 127 명이 투옥되는 3·1운동 사상 최대의 탄압을 가하였던 것이다. 양성 원곡지역의 만세운동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계획적, 공세적, 정면대결의 특징을 갖고 있다. 원곡·양성의 3·1운 동은 장날이 아닌 날에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순사 주재소도 없고, 일인 들이 없었던 면面 에서 일본 순사 주재소, 우편소, 일인 상점, 고리대금업자가 있 는 이웃마을로 쳐들어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전선을 끊고, 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 또는 방화했으며, 다리를 끊었고, 경부선 철도까지 차단하려 했다. 이는 사 전 계획없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만세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 세운동의 내용은 공세적이었고 정면대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은 정당방위적 만세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4월 1일 전개된 안성지역의 실력항쟁은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지, 일제의 무력적 진압이 이루어진지 1달이 지난 시점에서 발발하였던 것이다. 둘째, 대다수의 주민이 참여한 만세운동이란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원곡과 양성의 두 면에서 2,000여명이 모였다. 원곡·양성의 3·1운동이 공세적인 정면 대결시위로 전개된 날은 1919년 4월 1일이었다. 이날은 장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밤 8시경부터 새벽 4시경 사이에 이 시위가 전개되었고, 다수의 인원 이 참여하였던 것이다. 셋째, 만세운동의 지도부는 다양한 보통사람들이었다. 이덕순 (내가천리, 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