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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65 서 전개된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29일, 30일, 31일 계속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31일의 시위 후 해산할 때에 칠곡리 이유석·홍창섭(홍찬섭) 이 “내일도 모이라”고 명하였다.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칠곡리에서는 아침에 주민이 모여 만세를 불 렀다. 이날 저녁, 면민들이 다시 원곡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여 저녁 8시경 횃불을 밝혀 들었다. 원곡면 사무소 앞에 모인 원곡면 각 동리 주민 1,000여 명은 태극 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그 중 이유석은 군중들에게 “이제부터 면장 을 끌어내어 국기를 쥐어 이를 선두에 세우고 일동이 만세를 부르면서 양성 주 재소로 가자”고 하였다. 주민들은 면장 남길우와, 그와 함께 있던 면서기 정종두 를 끌어내어 태극기를 쥐어 주며 만세를 부르게 했다. 시위 군중들이 연달아 만세를 부르며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성 은고개에 이르자, 이유석이 군중 앞에 나서서 “오늘밤 기약함이 없이 이렇게 많 은 군중이 집합하였음은 천운이다. 제군은 양성 경찰관 주재소로 가서 내지 (일본) 인 순사와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순사가 이를 응하면 좋 으나 만약 응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로서도 할 바가 있다”고 연설하였다. 이어서 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이희룡 등이 교대로 일어나서 군중들에게 “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시행하는 관청은 불필요하기 때문 에 우리들은 모두 같이 원곡면·양성면 내의 순사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 등을 파괴하자. 또한 내지(일본)인을 양성면내에 거주케 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 내지인을 양성으로부터 구축하자. 제군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성히 활동 하라”고 하였다. 이에 시위 군중들은 양성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이 있는 양성면 동항리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