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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57 인수만, 김명우, 김응오, 김교철, 김여근, 김황운, 윤영선 등은 주재소를 향하여 돌을 던졌다. 이영쇠는 주재소를 불태워 버리려고 주재소 뒤로 달려가 불을 놓 았다. 이에 주재소 안에 있던 순사 川端豊太郎이 총을 쏘면서 도망쳐 나오자 군 중들은 그를 추적하고 정서성, 이영쇠, 이순모, 차인범은 군중에 솔선하여 몽둥 이로 그를 구타하였다. 차희식, 장소진, 장제덕은 돌 또는 몽둥이로 그를 난타하 여 기세를 부채질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순사가 발사한 총에 장안면 사곡리의 이경백이 순국하였다. 결국 주재소는 전소되고 일본 순사는 골파열을 동반하는 열창 1개 이외에 30여 개의 창상을 입고 뇌진탕을 일으킴과 동시에 두개골절 출혈을 하여 마침 내 죽게 되었다. 화수리 항쟁이후 주민들은 일단 해산한 후 저녁을 먹고 남산에 모여 군대 와의 회진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화수리 탄압 4월 4일 새벽, 어둠의 장막을 찢으며 사방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메아리쳤다. 일 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유전 有田(아리다 - 제암리 학살의 주역) 중위가 이 끄는 1개 소대병력이 발안에서 달려와 화수리를 완전 포위하고 마구 총질을 해 댔다. 화수리 여수동·화수동·굴원리 주민들은 일경의 보복을 예상하고 노인 들만 남기고 캄캄한 밤중에 원안리와 호곡리 바다 쪽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피신 했다. 수비대들은 동네에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집집마다 불을 놓고 보이 는 주민들은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몽둥이질을 하여 탈진해 쓰러지면 냇가에 들 어다 팽개쳤다. 화수리 구장 송찬호는 72군데나 칼로 난도질을 당했다. 이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