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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53 김치덕, 장봉래, 차희식, 장순명으로 그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무소를 부수고 서류에 불을 지른 것은 차봉습(차희식-필자주)이었다. 고 하고, 이어서 화수리항쟁과 관련하여서도, “주재소에 가서는 차희식이 방화하 겠다고 하면서 주재소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김치덕, 장봉래, 장순명, 그밖 에 많은 사람들은 앞에서 주재소에 투석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장봉래, 김치덕 등은 자신의 소작하던 토지를 일본인 간척사업 감독 石倉에 게 빼앗긴 일이 있었다. 이점이 이들이 만세운동 참여에 일조하였을 것으로 추 정된다. 장제덕은 수원군 양감면 출신으로 당년 38세였다. 무종교, 무교육상태 였다. 장소진은 석포리출신으로 주소지를 주곡리에 두고 있었다. 그는 당시 34 세로, 종교는 없고, 무교육이었다. 김흥식(김치덕)은 당년 37세로, 수원군 음덕면 무송리 출생으로 당시 우정면 주곡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동년 4월 3일 주곡리의 차희식과 그 동지인 장제덕, 장소진 등은 석포리에 서 이영쇠 등에게 대하여 “오늘 면내에서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독립만세 를 외칠 터이니 나와서 참가하라”는 뜻을 전하였 다. 특히 이들은 오늘 다 나와서 만세를 부르게 되어 있다. 나오지 않는 사람의 집은 불태워버린 다고 하면서 돌아다니므로 나도 집이 불타면 큰 일이라고 생각하여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영 쇠는 특별한 종교가 없으며, 문맹인 인물이었다. 한편 차희식 등은 우선 주곡리 구장 한규회 (한운경)를 찾아가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차희식 사진(독립기념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