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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51 라고 하여 석포리 사람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특히 어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참여는 간척사업이 완성되었을 때 생업을 잃을 가능성 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에도 간척사업의 경우 어민들의 생존권 문제가 야 기될 수 있다. 또한 만세시위 이후 5월부터 석포리의 구장을 담당한 김현갑 청취 서에 따르면, <석포리에서 누구누구가 갔었는가>라는 질문에, 남김없이 다 갔다. 한 사람도 소요에 가담하지 아니한 사람은 없다 라고 하여 석포리사람들이 모두 참여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석포리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바로 간척사업이 그들의 생존권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간척지가 생기면 주곡리의 경우 부 유해 질 수 있으나 석포리의 경우 생존권에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따 라서 주곡리의 경우 석포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차희식, 장소진, 장제덕 등이 주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한편 주곡리의 구장인 한규회는 차희식이 만 세운동에의 동참을 요구하자 이를 찬성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 외 주곡리 주민 들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차희식 등은 이 마을 사람들은 할 수 없는 놈들이라 고 욕을 하였던 것이다. 석포리 사람으로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요 인물을 도 표로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표2-3-2> 석포리 거주자로서 3·1운동 참여자 인명 나이 주소 종교 학력 비고 車炳漢 36 522 무 한학 석포리구장 李永釗 22 100 노동자 印壽萬 26 417 尹永善 26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