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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49 일 구장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한편 차병한은 1918년 여름까지 매일신보 를 직접 구독하였으며, 그 후에는 7촌이 되는 차상문의 집에서 매일신보를 보 고 3·1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파악하였다. 차병혁은 당시 31세로 우정 면 석포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당시 지역의 지주 송영만 25) 의 마름을 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는 윤택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 의 부친 차상문과 동생 차병억( 당시 24세) 은 포목상을 하고 있었 다. 차병억은 당시 솔가리 수백개를 사 모아 배에 실어 서울 쪽으로 싣고 가 장 사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영야와는 7-8년 전부터 아는 사이이고, 석창과 는 1918년부터 아는 사이었다. 석포리의 개간 사업은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주 민들과 배를 이용하여 서울과 장사를 하던 차씨일가에게는 큰 경제적 타격이었 을 것이다. 시위가 있기 1주일전인 3월 27일 구장회의가 열렸다. 이때 참석자는 수촌 리의 백낙열, 어은리의 리시우, 독정리의 최건환, 장안리의 김준식, 덕다리의 김 대식, 사낭리의 우시현, 사곡리의 금찬규, 금의리의 리호덕, 석포리의 차병한, 노 진리의 금제윤의 아들 등 10명이었다. 이 회의에서 석포리의 구장 차병한이 일 25) 송영만은 당시 43세로 우정면 멱우리 229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차병한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