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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두르면서 오늘이 밥을 마지막으로 먹는 것이니 다 오늘이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활동해야 한다. 그리고 남의 일이 아니고 각각 자기의 일이라고 생각하라는 등 의 말을 하면서 주창하였다. 아울러 순사를 살해한 후 백낙열은 이제 수비대가 오면 총으로 우리를 사살할 것이니 남산에 가서 웅거하여 대항하자고 결사항전 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김교철 중심의 수촌리의 기독교세력 수촌리 주민들은 화수리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3-4차 례에 걸쳐 일제의 탄압을 받아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던 것이다. 수촌리 참여자 가운데 방축골을 제외한 큰말, 가장말, 꽃밭에 등에 기독교 신자들이 다수 거주 하고 있었다. 이들 기독교인들의 지도자는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김교철이 그 중심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당시 41세의 나이로 1910년에 기독교에 입 교하여 1916년에는 남양교회 담임전도사를 역임하였으며, 3·1운동 당시에는 수 촌교회와 제암리교회의 담임전도사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김교철은 4월초 풍문을 통하여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4월 2일 밤에 그는 교회당에서 예배를 보았다. 이때 4월 3일의 만세운동에 대한 논 의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김교철이 예배를 보고 나올 무렵 수촌리 부근에 있 는 14개소의 산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또한 수촌리 산에서도 만세를 불렀다. 김교철은 일제의 신문에서 독립에 대한 견해를 묻자, 나는 다만 신의 뜻에 따르므로 별로 독립이 되어서 좋을지 나쁠지는 모르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