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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는 용인군 이동면 묵리 출신으로 당 41세. 교육을 받은바 없으나 당시 주곡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한편 석포리에서 일을 하고 있던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는 3·1운동에 참여 한 것으로 보인다. 우정면장 최중환은, “석포리사람으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 사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이 주모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우정면장 최중환은 3·1 운동의 주모자는 “석포리 사람으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사에 고용되어 있는 사 람이라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석포리에서 간척공사를 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소작을 빼앗아서 자신의 밑 에서 일하는 인부들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문춘실은 1919년 7월 2일 경성 서대문 감옥에서 열린 신문조서 제2회에서 문: 그대가 쌍봉산에 올라가 있었다는 것은 장봉래, 김치덕 등의 진술에 의하 여 명백한데 어떤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 그 사람들이 소작하는 토지를 石倉이 빼앗아서 나에게 소작을 하도록 한 일이 있다. 그러한 관계로 그 사람들이 나를 모함하는 지도 모른다 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점을 통하여 볼 때 일본인들은 임의로 한인들의 소작권을 빼앗기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소작권을 빼앗긴 한인들은 이에 깊은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 한편 당시 석포리에서는 바다를 막는 일로 인해 각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 동리에는 많은 주막들이 있었고, 술집도 여러 집이 있었 다. 일본인 감독들은 술을 마시면 주민들에게 횡포를 부렸으며, 아녀자들에게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