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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였다. 1919년 당시 25세였다. 1918년 3월 26일 순사보에 임명되었으며, 그 전에 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10일 화수리주재소에 착임하였다. 순사 보 이상룡은 1919년 당시 23세였으며, 주소는 수원군 수원면 남창리였다. 그는 1918년 10월부터 1919년 4월 3일까지 화수리 주재소에서 근무하였다. 1917년 장안면 화수리에 주재소가 설치되자, 부임한 川端 순사는 조선인들 을 가혹하게 취급하였다. 특히 조선인들에 대하여 위생검사 등을 시행하여 조선 인들을 모욕하는 사태들이 벌어졌다. 그는 당시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조 선인들의 빰을 때리는 등 모욕적인 언사와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천단 순 사는 부임 이래로 도박에 대하여 심하게 단속하였기 때문에 동민의 반감을 사 게 되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죽인다는 상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곡리의 차희식의 경우 도박혐의로 옥고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따라서 차희식 은 주곡리, 석포리, 수촌리 등의 주민들을 중심으로 화수리 항쟁을 이끄는데 주 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우정면 장안면 일대의 간척사업 화성시에 연하고 있는 해안선의 길이는 장장 196km로 이는 경기도 해안선의 약 절반에 해당되는 거리이다. 해안선의 모습은 드나듦이 대단히 복잡하여 전형적 인 리아스식 해안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화성시의 해안선은 굴곡이 특히 심하고 조차가 큰 데다가 수심이 얕아 간 사지의 발달이 두드러짐으로써 간척사업이 용이하다. 따라서 이곳 해안에서는 일찍부터 크고 작은 간척사업이 진행되어 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과거에는 주로 주민들의 손에 의하여 갯벌을 조금씩 막아 경지로 이용되어 오던 것이 일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