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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37 립 화성학교에서 7개월, 수원 사립 측량학교에서 4개월 공부하였다. 또한 서울 에서 경무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순사보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어를 야학하여 간단한 회화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1918년 12월 19일 부터 우정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현묵의 재산 정도를 보면, 주택 초가 한채 싯가 180원, 논 4두락 반, 싯가 450원, 밭 사흘갈이 싯가 300원, 산 3000평, 싯가 200원, 빌려준 소 두 마리 싯가 200원, 면장 봉급 1달에 14원 등이며, 가족은 총 7명이다. 우정면장인 최중환은 우정면 한각리에 거주하였으며, 당 43세였다. 그 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우정 장안면민들이 면사무소를 파괴한 것은 순사보 오인영의 신문조서에 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면사무소가 세금을 많이 징수하고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화수리주재소의 설치와 주민탄압 일제는 1910년 조선을 강점한 후 식민통치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하여 동년 9 월 10일 칙령 제343호로 <조선주차헌병대조례>를 발표하였다. 이어 일제는 이 를 토대로 <조선통감부 경찰관서제>를 공포하여 통감부의 헌병 경찰제도를 확 립하였다. 이와 같은 기구를 갖춘 헌병경찰은 1910년에 전국에 1,135개의 헌병 경찰기관에 경찰 5,694명, 헌병 2,019명, 합계 7,713명으로 당시 한국인 2천명 에 1명씩으로 되었다. 이들 방대한 조직을 갖춘 헌병경찰은 군사, 치안뿐만 아 니라 행정, 사법 기타 잡무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다 간섭할 수 있는 권한 을 갖고 있었다. 일제는 1914년 3월의 부, 군, 면을 통폐합하여 12부, 220군, 2,522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