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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29 하는 한편 일본 순사를 죽인 대표적인 항쟁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는 이 사 건을 단순 소요사건이 아닌 내란죄로 규정하여 강력히 처벌하고자 하는 강한 의 지를 표하였던 것이다. 또한 화수리, 수촌리를 비롯하여 우정, 장안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행위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차희식, 이영쇠 등이 징역 15 년에 처해지는 등 20여명이 실형에 처해졌으며, 장안면의 경우 일본측 통계에 따르면 수촌리 33호, 석포리 2호, 독정리 2호, 기린리 12호, 사곡리 1호 등 총 50 호, 우정면의 경우 조암리 10호, 한각리 1호, 화수리 19호 등 총 30호가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화수리 지역의 만세운동에 대하여는 별로 주목하지 못하였다. 화성지역의 3·1운동의 경우 제암리 학살사건 등 주민의 피 해 현장에 주로 주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우정, 장안 지역 3·1운동 참여자들에 대한 심문조서가 간행된 이후 이정은이 우정면, 장안면 지역의 만세운동을 개척적으로 다루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는 화성의 우정, 장안지역이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이란 점을 간과하 고 있다. 따라서 당시 석포리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간척사업에도 별로 주목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또한 당시 화수리에 설치된 주재소가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 등에 대하여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주도세력의 경우 천 도교적 시각이 강한 김선진의 책에 의존한 결과 운동의 주도세력이 수촌리의 백 낙열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세력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 결과 운동의 주도세 력인 석포리의 차병한, 주곡리의 차희식 등 주모, 행동집단, 특히 전통적인 유교 세력의 참여에 대하여도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기독교, 천주교세력에 대하여도 등한시하였다. 또한 화수리 행쟁의 결과 화수리 등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