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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수촌리 일대에 출동하였다. 그 후 4월 2일부터 6일까지 일차로 만세시위가 진 정되지 않자 4월 9일 헌병 특무조장律村 아래 하사 이하 6명과 경찰관 4명이 경 찰서장 古屋 이하 7명과 보병 15명의 협력을 얻어 3개 반을 편성하여 오산, 화수리 반도 및 사강 반도로 검거활동을 또 다시 나섰다 이들은 14일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사강리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 송산면, 마도면, 서신면의 동리 20개 리 에서 주동자 이하 175명을 검거하고 증거품 여러 점을 압수하였다. 특히 이들은 닥치는 대로 체포 구금하고 민가에 방화하기 시작하였다. 붙잡 혀간 사람들은 모조리 “세탁봉 또는 장작으로 머리 또는 허리를 힘껏 구타”당하 였다. 헌병과 경찰은 서로 떨어져 있는 동리를 돌아다니면서 방화하였는데, 사강 리를 비롯하여 봉가 삼존 육일 마산 중송 등 6개 동리 총호수 525호에서 200여 호를 소각하였다. 가장 심하였던 곳은 사강리와 봉가리였다. 사강리에서는 131 호 가운데 82호가 불타 없어졌고 22) , 봉가리에서는 57호 중 47호가 불탔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성냥을 다 써버려 짚에 불을 붙여 방화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경 은 4월 12일의 방화 뒤에도 4월 16일 일본헌병은 다시 송산면에 출동하여 주모 자 집을 다 소각하지 못하였다는 구실로 나머지 집에 방화하였다고 한다. 한편 1920년 4월 6일부터 4월 17일 사이에 소실된 호수, 사망자, 부상자 등 을 일본측 통계를 통하여 보면 다음 <표2-2-5>와 같다. <표2-2-5> 남양반도지방 검거 및 손해상황 검거지방 검거로 인한 손해 소실호수 사망 부상 송산면 사강리 81 4 마산리 1 1 22)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도리(현재 사강 2리)에 있는 송산중학교 근처에서 많은 집이 불타고 사람들이 다수 희 생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