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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령》에 의하여 초등학교의 교육은 변질되었다. 종래의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개칭 하고 수업연한도 종래의 5-6년을 4년으로 단축하였다. 교과목은 종전과 차이가 없었으나 일본어를 전학년에 걸쳐 매주 6시간 부과하는 등 한국교육을 식민지 교육으로 재편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화성군의 남양공립소학교도 《보통학교 령》에 의하여 1906년 공립남양보통학교로 개칭되기에 이르렀다. 1908년에는 2 학급으로 편성되어 초대교장에 남양군수 김관현이 임명되었다. 1911년 11월 4 일 《조선교육령》의 실시에 따라 남양공립보통학교 개칭되었다. 한편 문상익은 한문과 일본어를 해득할 수 있었다. 홍종옥은 남양의 사립학교에서 1년간 수학 하고 서울로 올라가 야학교를 다녔다. 한문을 10년 간 공부하고 남양보통사립학 교를 졸업하였으며, 한문 및 일본어에 능통하였다. 넷째, 종교의 경우를 보면 김명제가 기독교인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교를 신앙하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이점은 우정면, 장안면, 향남면의 경우가 주로 기 독교, 천도교인들이 많이 참여한 것과 비교되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앞으로 기독교, 천도교 관계는 보다 심층적인 검토가 필요할 듯하 다. 기독교의 경우 1902년 3월에 남양읍, 양철리, 용머리, 경다리, 포막, 덕방리, 영흥도, 대부도, 선감도 등 아홉 교회들로 “남양계삭회”(구역회)가 조직되어 있었 던 것이다. 또한 만세운동의 중심지인 송산면 사강 정교동에 1908년에 감리교 사강교회가 설립되었고, 1919년에 방화소실되었고, 1920년 5월에 15평 교회를 재건하였다고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용포리에는 1906년에 감리교 당산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한다. 특히 정교동의 경우 일제에 의하여 가장 많이 탄압 받고 많은 집이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천도교의 경우도 동학이 1880년경부터 전해지기 시작하여 1909년 8월에는